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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사회적 경제’와 ‘사회적경제’의 차이, 충돌하는 관점
112.☆.162. 102
작성자 : 대전광역자활센터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할 때 '사회적'과 '경제'를 띄어 쓰는 경우('사회적 경제')와 하나의 단어처럼 '사회적경제'로 붙여 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두 경우가 쉽게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아직 통일된 표기법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단순한 띄어쓰기의 혼란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차이가 ‘사회적+경제’에 대한 다른 관점과 사고를 내포 할 수 있는 현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은 사회적+경제에 대한 띄어쓰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회적 경제, 경제를 꾸며주는 사회
 
 
경험상, 주로 경제, 경영 전문가들의 관련 글에서 ‘사회적 경제’라고 표기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이들은 사회적이란 말이 경제를 수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경제’의 중심은 경제에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결국 사회적경제도 경제논리의 하나 일 수밖에 없고, 가치와 무관하게 이윤 생산이 최종 목표란 이야기를 강조할 경우가 많다.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경우는 주로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큰 틀을 유지한 채, 보충적인 개념으로 사회적 경제를 인식하고자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에서는 경제라는 ‘이윤추구’,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먹고살기’의 문제를 어떻게 ‘사회적’인 것으로 치환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고민에 가깝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에게는 이미 경제라는 의미에서 ‘사회적’이란 의미가 내포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경제’는 ‘역전 앞’처럼 겹쳐 쓰는 말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어떤 것은 사회적이고 또 어떤 것은 사회적이지 않냐는 불필요한 혼란이 발생하고,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별 취향과 감별이 작동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먹고살기를 위하여 다양한 ‘사회적’인 가치와 방법론을 활용하여 자유롭고 창의적인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 사회와 경제가 만나는 다른 경제 영역
 
최근에는 주로 ‘사회적경제’라고 마치 한 단어처럼 붙여 쓰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신조어처럼 여겨지고 기존의 경제와 다른 어떤 경제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새로운 말이 처음 나올 때 어떤 명확한 정의와 개념으로 출발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쓰임과 변화에 따라 그 언어의 뜻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렇게 붙여 쓰는 경우는 언젠가 ‘사회적경제’가 하나의 공통되고 통일된 지향점을 가지고 영역을 가져갈 것이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사회적경제를 하나의 협력과 연대로 구성된 장(field)으로 인식한다.
물론 맞춤법을 따르자면 사회적+경제는 형용사와 명사로 품사가 다르기에 띄어 쓰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적’(的)을 접미사로 볼지, 아니면 명사(어떤 일의 목적이 되는 대상)로 볼지에 따라 붙여 쓰거나 띄어 쓸 수도 있다.
‘사회적 경제’든 ‘사회적경제’든 표기법상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두 경우 모두 상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은 어쨌든 ‘경제’라는 것이다. 사회 혹은 사회적이란 말은 명사 혹은 수식어처럼 사용된다.
이는 결국 “사회적+경제”가 둘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경제를 목적으로 한 사회라는 지점에서 양태적으로 갈라진다.
 
 
문제는 경제라지만...
 
이는 사회적경제가 출발한 배경이 ‘저성장, 고실업’ 사회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조금이라도 활성화 되어야 실업 문제가 해결된다는 동의에 의해 기존의 방법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 사회적경제의 시작점이다. 이러한 출발 지점에서 ‘사회적+경제’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되어 왔다. 오히려 양쪽에 사회적+경제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대안이자 이념적 지향의 중도의 개념처럼 받아들였다. 좌파의 입장에서는 계량화되어 결국 기존의 경제체제를 강화할 것이란 우려가 있고, 우파 입장에서는 기존 경제체제 안에서 이러한 흐름을 포함하지 않으면 현재의 경제 체제 모순의 해결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국가를 중심으로 대중들에게 ‘사회적+경제’는 ‘착함’이란 모호한 윤리성을 부여하고, 모두에게 불편하지만 (아직) 위험하지는 않은, 그래서 조금씩 사회적인 필요를 확대하는 개념이었다. 덕분에 지난 4월 달에 여, 야에서는 각자 따로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발의하였고 거의 통과 될 뻔 했었다. ‘사회적+경제’에 대한 위상이 기본법을 통해 성문화 될 뻔 했다. 이 과정까지 오기에 몇 년의 시간이 걸렸고 인식에 대한 변화도 있었다.
초기(2007년 이전 부터)에는 사회적경제를 대표하는 사회적기업이 마치 새로운 대안처럼 다소 포장되어 언론에 관심을 받아왔다.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기에 주목을 받기도 했었다. 대안으로 이야기 되었던 것은 사회적경제가 유일한 대안이라기보다 그만큼 지금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업이 이미 사회적인 역할을 잘 해왔다면 사회적기업 혹은 사회적경제는 등장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이 사회 가치와 이윤 추구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가 새롭고 신선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사랑 받았다 할 수는 없지만 서서히 관심을 갖거나 최소한 미움을 받지는 않았고 다른 나라와 달리 상대적으로 정부의 도움도 있었다.
 
 
사회적+경제에 대한 냉소와 무시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은 의심과 냉소적인 시선에 가깝다. 실제 우리 사회는 다른 사회에 비해 사회적경제에 대한 역사가 짧다. 이제 10년도 채 안 되었기에, 사회적경제는 아직 진행 중인 실험에 가깝다. 지난 시간 동안 사회적경제가 얼마나 사회적 가치를 향상했는지 혹은 경제적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면 아직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현장에서 조금씩 작은 성과들을 쌓아올리는 중이다. 여전히 초기 단계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설은 신자유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 여전히 꿈같은 일일 수 있다.
사실 가장 냉소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가까운 ‘비영리단체’들이다. 이는 사회적경제가 비영리 영역을 기반으로 출발하였고, 비영리의 순수성을 훼손시킨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비영리 영역도 이미 시장화 되고 기업화되어 운영되고 있으면서 사회적가치를 통해 경제를 추구한다는 구호에 순수성이 떨어진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은 사회적경제가 뭔지 아직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며’ 복잡한 이야기를 듣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제품의 질이나 서비스가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결국 경제란 주체와 소비자가 함께 순환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시장의 소비자들은 사회적경제에 냉랭한 편이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가며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가 늘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경제 중 사회적기업은 아직 기업이라고 하지만 대기업에 비하면 그리고 중소기업에 비해서도 아주 작은 수준의 규모를 갖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증제로 인해서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하기도 해서 내실이 부족하기도 하였다. 대부분 경제적 기반이나 자원을 갖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의지로 출발하였기에 기업의 성장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였다.
특히 대기업들이나 영리 컨설턴트들이 무시하는데, 시장 경제의 원리나 속성과 같은 ‘현실’을 잘 모르는 아마추어 취급을 한다. 그리고 이미 사회적기업에 대한 국가 지원금이 없거나 많이 축소된 상황인데, 정부 지원금도 주는데 경제적 성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업 역사를 보면, 대기업의 성장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뤄져왔다. 정부의 각종 특혜를 통해서 탄탄하게 성장하여 사다리를 걷어찬 기업들이 사회적기업에게 주는 쥐꼬리만한 지원금 몇 푼으로 그들이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불공평해 보인다. 지금도 한 대기업이 받는 세금 지원 혜택이 전체 사회적기업의 정부 지원금 보다 많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정부 지원은 대기업들이 많이 받아 왔고, 받고 있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사회적+경제가 ‘자생성’이 없다고 자주 보도하는데, 사실 광고 수익에만 의존하며 기업의 눈치를 보는 언론이 할 말은 아니다. 사회적경제보다 사실 언론이 더 의존적인 시장을 가지고 있다. 몇몇 성공한 벤처기업들도 결국 주식 상장하거나 투자를 받거나 기업을 팔아서 이익을 남겼을 뿐이지 실제로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도 별로 없다. 어느 국내 굴지의 게임사가 돈을 많이 번 비즈니스 모델도 부동산 임대료이기도 하다. 사회적+경제가 수익이 적은 건 기존의 시장 질서가 이미 금융과 자본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 사라진 사회적경제 내부, 사회적 경제를 둘러 싼 외부의 적대
 
오히려 사회적 생태계의 성장을 위해서는 건전한 비판이 늘어나야 하는데, 비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특히 사회적경제 내부에서 지금 사회적경제가 지향하는 방향이 맞는가, 혹은 가치 있는가, 사회적기업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하지만 ‘연대와 협력’ 혹은 네트워크란 명목으로 내부 비판을 하지 않는다. 사회적경제에 대한 가치, 지향점 혹은 역할 등의 큰 논의 없이 ‘기본법’부터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닌가 반성이 든다. 또한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으로 뿔뿔이 나누어져서 서로간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중심으로 각자의 영역만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외부적으로도 사회적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활성화될 수 있을지 애정 어린 조언도 필요하다. 오히려 사회적+경제는 ‘그들 만의 경제’로 인식되며 하나의 성을 쌓아가면서 내부적, 외부적 비판이 사라진 것이 문제이다. 비판이 사라졌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경제는 많이 인식되기는 하였지만, “사회적경제란 좋은 것 같은데, 그게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는 그들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적경제 내부 시스템에선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은 사회적경제에 대한 기본적 가치와 원리를 명문화하며 사회적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 불편함을 느낀 세력은 새로운 적대를 표현하였다. 지난 6월 3일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열린 “사회적 경제 기본법안:경제 회복의 또 다른 걸림돌”이란 세미나는 사회적경제에 대한 기존의 관심(무시와 냉소, 비판)을 넘어선 적대의 생산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띄어쓰기에 주목하면, 발의된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 대해 “사회적 경제 기본법안의 문제점과 허구성을 지적한 세미나의 발표문을 보면 “이 법안은 자유시장경제 체계를 바탕으로 자유와 창의라는 기본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각종 보조금과 세제해택을 포획하려는 비생산적 지대추구활동을 부추기는 유인구조를 제공하는 등 경제적 부작용을 야기”시킬 것이라며 ‘사회적 경제’가 “우리나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역동성을 훼손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응은 기존에 사회적+경제에 대한 반응 중에서 사회적+경제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한 주장이자, 그 동안의 사회적인 합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사회적+경제’를 상대로 경제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투쟁을 만들고자 한 의도가 서려 있다.
협력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경제”가 자유와 창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며, ‘사회적 경제’가 기업가정신을 왜곡할 것이란 이 주장의 설득력 없음을 떠나, 이들의 목표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한줌도 안 되는 ‘사회적경제’란 영역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기 보다는 이런 가치를 법안으로 만들어 성문화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한 불만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경제”에 대한 새로운 국면은 기존과 달리 적대적인 입장이 나타났다는 점과 그 적대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사회적 가치가 ‘자유와 창의’인지 아니면 ‘협력과 연대’인지를 설정함에 따라 앞으로의 ‘사회적+경제’의 해석과 지향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적대적 의식을 마주하면서 ‘사회적경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에 따른 ‘사회적 경제’를 구현할 때, 좀 더 세심하게 ‘사회적’인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허구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불필요한 투쟁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와 창의, 협력과 연대를 대립시키지 않은 개념으로 포괄하고자하는 실천적 노력이 필요해졌다.


* 이 글은 문화연대 웹진 <문화빵>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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